보건관리자 업무 범위, 어디까지가 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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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관리자로 발령이 나면 그날부터 “보건 쪽은 알아서 해주세요”가 됩니다. 어디까지가 내 일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채로요. 그러다 몇 달 지나면 화학물질 대장, 건강검진, 작업환경측정, 위원회 회의록, 여기에 중대재해처벌법 대응까지 책상 위에 올라옵니다.
법이 정한 보건관리자의 업무는 열네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열네 가지를 실제로 읽어보면, 흔히 생각하는 것과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열네 개 중 여덟 개는 “조언”이다
업무 목록은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제22조 제1항에 있습니다. 조문을 읽으면 같은 꼬리말이 계속 붙습니다. 세 개만 보면 바로 보입니다.
3. 법 제36조에 따른 위험성평가에 관한 보좌 및 지도·조언
4. 법 제110조에 따라 작성된 물질안전보건자료의 게시 또는 비치에 관한 보좌 및 지도·조언
12. 법 또는 법에 따른 명령으로 정한 보건에 관한 사항의 이행에 관한 보좌 및 지도·조언
이 꼬리말이 붙은 항목을 다 세면 여덟 개입니다. 2호 보호구 적격품 선정, 3호 위험성평가, 4호 MSDS 게시, 6호 보건교육계획, 8호 환기장치 점검과 작업방법 개선, 10호 산업재해 원인조사, 11호 산업재해 통계, 12호 법령상 조치의 이행. 9호는 “사업장 순회점검, 지도 및 조치 건의”로 표현만 다르고 성격은 같으니 아홉 개로 봐도 됩니다.
이 꼬리말이 왜 계속 붙는지는 보건관리자의 정의 자체에 답이 있습니다. 보건관리자는 안전보건관리책임자의 업무 중 보건에 관한 기술적 사항을 보좌하고, 관리감독자에게 지도·조언하는 사람입니다. 사업장 보건을 총괄하는 사람은 안전보건관리책임자이고, 현장에서 실제로 조치하는 사람은 관리감독자예요.
실무에서 이게 무슨 뜻일까요. 환기장치를 고쳐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 그 판단을 하는 것이 내 일이고, 예산을 세워 고치는 것은 내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조언을 했는데 반영되지 않은 것과, 조언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은 완전히 다른 상황입니다.
그래서 조문 13호가 중요해집니다.
자격과 무관하게 무조건 내 일인 것은 하나
13. 업무수행 내용의 기록·유지
열네 개 중에서 조건이 붙지 않고, 남에게 넘길 수도 없고, 자격에 따라 갈리지도 않는 항목이 이것입니다. 법은 이걸 그냥 “기록해두라”고 말하지만, 위의 구조를 보고 나면 성격이 달라 보입니다. 권한이 없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기록이에요.
점검에서 묻는 것도 결국 여기입니다. 사고가 났을 때, 또는 감독관이 왔을 때 확인하는 건 “문제를 알고 있었나”가 아니라 “알았다면 무엇을 했나”입니다. 순회점검에서 발견한 것, 건의한 날짜, 회신 내용. 이 세 줄이 남아 있으면 조언한 사실이 증명되고, 없으면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직접 해도 되는 일은 자격에 따라 갈린다
열네 개 중 두 항목에는 “~에 해당하는 경우로 한정한다”는 괄호가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별표 6은 보건관리자의 자격 기준이고, 2호는 의사, 3호는 간호사입니다.
5. 제31조제1항에 따른 산업보건의의 직무(보건관리자가 별표 6 제2호에 해당하는 사람인 경우로 한정한다)
7. 해당 사업장의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다음 각 목의 조치에 해당하는 의료행위(보건관리자가 별표 6 제2호 또는 제3호에 해당하는 경우로 한정한다)
가. 자주 발생하는 가벼운 부상에 대한 치료
나. 응급처치가 필요한 사람에 대한 처치
다. 부상·질병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처치
라. 건강진단 결과 발견된 질병자의 요양지도 및 관리
마. 가목부터 라목까지의 의료행위에 따르는 의약품의 투여
산업위생관리산업기사나 대기환경산업기사 자격으로 선임된 보건관리자라면 7호가 내 업무 범위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상비약을 나눠주는 일이 여기 걸립니다. 관행으로 해오던 사업장이 꽤 있는데, 근거가 되는 조항이 자격을 명시적으로 제한하고 있어요.
현실적인 대응은 두 가지입니다. 의약품은 근로자가 스스로 꺼내 쓰는 상비함 형태로 두고 투여에 관여하지 않거나, 산업보건의나 근로자건강센터와 연계해 처치가 필요한 경우의 연락 경로를 미리 정해두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누가 판단하는지”를 문서에 적어두면 나중에 곤란해지지 않습니다.
겸직이라면 시간을 보장받아야 한다
보건관리자를 겸직으로 두는 사업장이 많습니다. 인사팀 직원이 보건관리자를 겸하고, 실제로는 보건 업무에 쓸 시간이 없는 상황이죠. 이 경우에 쓸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585시간을 열두 달로 나누면 한 달에 약 49시간, 주당 열한 시간 남짓입니다. 상시근로자 250명인 사업장이면 785시간이 되고, 주당 열다섯 시간쯤 됩니다. 겸직 보건관리자에게 “남는 시간에 보건도 좀 봐주세요”가 성립하지 않는 수준이에요.
이 숫자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협의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시간이 부족합니다”는 반박하기 쉬운 말이지만, “고시 기준으로 연 785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는 다릅니다.
사업주가 갖춰줘야 하는 것 — 예산과 건강관리실
같은 조 제3항은 방향이 반대입니다. 보건관리자의 의무가 아니라 사업주의 의무예요.
뒷문장의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시설 및 장비”가 시행규칙 제14조인데,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의사나 간호사가 보건관리자인 사업장은 건강관리실을 갖춰야 하고, 그 요건이 이렇습니다.
- 근로자가 쉽게 찾을 수 있고 통풍과 채광이 잘되는 곳에 위치
- 건강관리 업무 수행에 적합한 면적 확보
- 상담실·처치실·양호실을 갖출 것
- 상하수도 설비, 침대, 냉난방시설, 외부 연락용 직통전화, 구급용구
창고 옆 파티션 안쪽에 책상 하나 놓고 건강관리실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조문과 맞춰보면 빠진 항목이 여러 개입니다. 개선을 요청할 때 이 목록을 그대로 쓰면 됩니다. 항목마다 근거가 있으니까요.
중대재해처벌법 총괄은 보건관리자의 일이 아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뒤에 이 업무가 보건관리자에게 넘어오는 사업장이 많아졌습니다. 담당자가 한 명뿐이니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보이지만, 고용노동부 매뉴얼은 이걸 권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우선순위 때문입니다. 보건관리자는 산업안전보건법상 직무를 먼저 수행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여기에 사업장 전체의 안전·보건을 총괄·관리하는 기능까지 얹으면, 산안법 의무를 하는 동안 중처법상 의무를 충실히 못 하게 되는 상황이 생깁니다. 그래서 별도 인력으로 구성하라는 것이 매뉴얼의 권고입니다.
인력을 늘리기 어려운 규모라면 최소한 역할 구분은 문서로 남겨두는 편이 좋습니다. 총괄은 누가 하고 보건관리자는 무엇을 보좌하는지, 안전보건관리규정에 한 줄로 정리해두는 정도로도 나중에 근거가 됩니다.
정리하면
판단하고 조언하는 것이 내 일이고,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은 사업주와 안전보건관리책임자의 일입니다. 내가 직접 손을 대도 되는 범위는 내 자격이 정합니다. 그리고 조언한 사실을 남기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업무 범위를 아는 것은 일을 줄이려는 게 아닙니다. 권한 없이 책임만 지는 상황을 피하려면 경계가 어디인지 먼저 알아야 하고, 그 경계가 조문에 이미 적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산업보건 담당자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한 참고 자료입니다. 법령은 개정될 수 있으니 시행 중인 조문은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확인해주세요. 내용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고치겠습니다.